낙동강 페놀오염사건
문창식 사무처장(대구환경운동연합)
낙동강 페놀사건이 발생한 지도 만 11년이 지났다. 1991년 3월 중순에 일어난 낙동강 페놀사건은 우리나라 환경오염 역사상 전 국민의 분노를 가장 격렬하게 일으켰던 사건이었다. 한 기업이 국민의 건강을 도외시한 채 독극물인 페놀을 낙동강에 쏟아 부었던 이 사건은 해당 기업뿐 아니라 정부, 국민, 기업 등 우리 사회 모든 주체들의 경각심을 일깨워 환경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페놀사건은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과거의 일부분이 되었지만 페놀피해임산부의 경우와 같이 이 순간에도 페놀로 인한 피해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페놀사건 진행과정에서 제기되었던 많은 의문들이 여전히 속 시원히 풀리지 않은 채 우리에게 숙제로 남겨져 있다. 이런 점에서 페놀사건은 아직도 우리 속에서 진행중에 있는 것이다.
1. 사건의 경위
1991년 3월 14일 22시부터 다음날 아침 06시까지 8시간동안 구미공단 내에 입주하고 있었던 두산전자에서 페놀원액 30톤이 불법 방류되어 인근 옥계천을 지나 그대로 낙동강 원수에 흘러들어 갔다. 방류된 페놀 폐수는 3월 16일경 대구시 경계에 위치한 낙동강 다사 수원지에 유입되었다. 다사 수원지에 유입된 페놀은 정수과정에서 사용하는 살균제인 염소와 화학반응을 일으켜 클로로페놀을 형성하였다. 불쾌한 냄새를 유발하는 클로로페놀은 페놀의 300-500배에 달하는 유독 물질이었다. 3월 16일 14시 30분에 대구시는 시민의 제보로 이 사실을 알고 즉시 원수, 정수에 대한 수질 분석을 실시하였고, 3월 17일 03시 30분 수질분석 결과 수돗물에 페놀이 함유되어 있음을 최종적으로 확인하였다. 수돗물에 페놀이 함유된 사실을 확인한 대구시는 3월 17일 03시 30분부터 06시 50분까지 신천의 소화전 배수전 대형 밸브를 열어 배출 작업을 확대하고, 안동댐 방류량을 초당 30톤에서 50톤으로 늘려줄 것을 공식 요청하였다. 그러나 대구시는 언론매체를 통해서는 페놀농도가 음용수 기준치 이하이므로 냄새는 나지만 인체에는 무해하다고 발표했다. 즉 대구시는 사건의 철저한 원인 규명과 피해확산을 예방하기보다는 사태 수습에만 급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사 수원지를 상수도로 하는 대구시의 남구, 달서구 전지역과 중구, 동구, 북구, 수성구 일부지역 42만 세대 162만명(당시 대구시 인구의 71%)은 이미 페놀로 오염된 수돗물을 마심으로써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다. 당시 한 조사에 의하면 페놀로 오염된 상수도를 이용한 시민의 약 92%가 수돗물에서 특유한 악취를 느꼈고, 44%가 소화기증상 등 여러 가지 페놀섭취에 따른 증상을 호소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페놀사건이 환경오염 사건인 동시에 보건사회분야에서도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페놀오염에 의한 피해지역은 대구지역에서 영남 전역으로 확산되어 3월 19일 오후에는 부산시민들의 상수원인 경남 물금취수장 부근에서 페놀이 검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피해지역의 확산으로 사태가 점차 악화되자, 급기야 정부는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 결과 검찰은 본격적인 수사를 착수하여, 사건 발생 3일 뒤인 3월 19일 구미공단의 두산전자에서 무단 방출된 페놀이 그 원인이었음을 밝혀 내었다. 이에 3월 21일 검찰은 두산전자 간부 6명을 구속하는 한편, 환경처는 두산전자에 대해 조업정치처분을, 대구시는 상수원 관련 공무원 10여명을 징계하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정치권 또한 각 정당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조사반을 편성하여 자체조사를 실시하고 책임자 처벌과 대책수립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는 1차 페놀파동이후 여론이 잠잠해지자 애초에 제시한 대책과는 달리 환경처 장관 및 대구시장의 문책방침을 철회했다. 뿐만 아니라 4월 8일 환경처의 행정심판위원회는 30일 동안의 조업정지처분에 대한 두산전자의 효력정지신청을 전자업계의 수출타격과 함께 ‘현지 확인 결과 사고재발 대책이 완비되었음’을 이유로 조업정지를 17일 만에 해제했다.
제2차 페놀 파동은 정부가 두산전자에 대해 변칙적으로 조업해제를 승인한 후 불과 14일 만인 4월 22일 동일한 공장에서 지상 페놀원액 공급라인 배관 이음새의 파열로 페놀원액 약 1톤이 다시 낙동강 본류로 유입됨으로써 발생하게 되었다. 1차 페놀파동에 연이어 2차 페놀파동이 발생하자, 대구시는 현지 조사단을 두산전자에 급파하고, 수질기동시험반을 가동하여 시간대별로 수질검사를 실시했으며 그 결과 낙동강에 위치한 취수장에 이르기까지 상수원수에서 페놀 검출을 확인했고, 시민들에게 식수 확보를 홍보하면서 비상 운반급수를 실시했다. 이러한 2차 파동으로 환경위기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과 정부의 환경정책에 대한 실망은 극에 달했고, 그제서야 정부는 마침내 환경처 장관과 차관을 전격 해임시켰으며, 두산그룹 회장 역시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환경처는 두산전자에 대해 64일의 조업정지 처분을 내렸다.
2. 사건 일지
1990년
·10월 21일 두산전자 구미공장, 페놀폐수소각로 1기 고장
·11월 1일 두산전자 1일 1.7톤의 페놀폐수를 매일 불법 방류 시작
1991년
·3월 14일 페놀원액탱크 연결파이프 파열로 페놀 원액 30톤 옥계천 유입
·3월 16일 대구시 수돗물 악취 주민 신고 접수,
다사 수원지 염소에서 이산화염소로 대체
·3월 17일 페놀 희석위해 안동댐 방류량 초당 30톤에서 50톤으로 증량
·3월 18일 경남 함안 칠서정수장에서 페놀 검출, 부산, 마산, 창원지역 수돗물 악취소동
·3월 19일 다사수원지 사무소장 직위 해제
·3월 21일 두산전자 공장장 등 6명 구속, 상수도 본부 직원 9명 징계, 민간공동조사단
구성 및 활동, 공추련 금붕어 페놀 독성 실험
·3월 22일 대구시 관련 공무원 소환조사, 평민당 총재, 민자당 대표 엄중 문책 및 처벌요구 환경
부 민 간 합동조사단 구성 및 활동
·3월 24일 노태우 대통령, 환경처장관과 대구시장 문책 않기로,
대구시민수돗물사태 시민규탄대회, 두산제품불매운동 제안
·3월 25일 평민당 4대강 수질오염조사단 구성
수돗물 오염 규탄 및 국민 건강권 쟁취 대구 시민 결의대회
·3월 30일 페놀 불법방류 규탄 및 수돗물 살리기 시민대회
·4월 16일 광역 수질정보교환협의회 구성
·4월 22일 두산전자 2차 페놀 방류
·4월 23일 대구시 수돗물 송수 중단
·4월 24일 두산그룹 회장 사임
·4월 25일 환경처 장관, 차관 경질, 대구시상수도사업본부 “상수도 수질감시위원회”구성
3. 대구시민 단체의 대책기구 구성
(1) 시민대책 기구의 구성
3월 16일 발생한 페놀 폐수로 인한 대구시 수돗물 오염사태가 3월 18일 언론 보도를 총하여 처음으로 시민들에게 알려졌다. 식수오염에 기인한 식품 등 물적 피해와 두통, 구토, 임산부들의 유산 등 신체적 피해가 속출하여 이에 대한 피해 배상과 공해 기업에 대한 응징 등 제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시민 연대 기구를 구성하기로 협의하여 대구시 수돗물 사태 시민단체 대책회의를 구성하였는데 참가 단체의 범위는 다음과 같다.
3월 21일 1차 대책회의
대구 경실련, 대구 YMCA, 대구 YWCA, 참길회, 함께하는 주부모임
3월 26일 2차 대책회의
위 5개 시민단체, 소비자 연맹 대구경북지부, 크리스찬 아카데미, 아카데미 주부 협의 회
4월 22일 3차 대책회의
위 8개 단체, 소비자 보호와 환경보전을 위한 변호사 모임
위와 같이 대구지역 9개 단체가 페놀 사태에 대응하여 연대 활동을 위한 대책기구로 서 대구시 수돗물 사태 시민단체 대책회의를 구성하여 시민운동을 전개하였다.
(2) 시민 대책회의 발표 성명 요지
3월 25월 임산부에 대한 대책요구 성명
– 3월 16일 페놀 파동 이후 두산그룹의 범죄 행위와 환경처의 업무 감시 소홀, 대구시 당국의 유기, 관리능력의 부재를 규탄한다.
특히 대구시가 페놀에 오염된 수돗물이 공급되어 신체적 고통과 임산부들의 피해 호소가 많은데도 언론 매체를 통해 클로로페놀은 악취는 나지만 인체에는 별다른 해가 없다고 홍보하고 피해보상 대상마저 식품에만 한정한 처사는 기만적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신체 피해 특히 임산부들의 피해에 대하여 종합병원에 의뢰하여 신속한 진료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한다.
4월 3일 성명
– 두산전자와 대구시는 페놀폐수에 의한 수돗물 오염사태에 대한 공동책임이 있음을 천명한다.
첫째, 대구시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며, 피해변상 등 향후대책을 신속히 발표하라. 둘째, 공포에 싸인 임산부들에 대한 즉각적인 대책을 촉구한다.
셋째, 대구시는 전문가 및 시민단체와 함께 수질검사 위원회를 구성하여 수질에 대한 신속하고도 지속적인 검사를 할 수 있는 조치를 단행하라.
넷째, 낙동강 수질 오염의 원인을 제공한 두산전자 및 그 이외의 기업에 관하여 기업의 반윤리적인 공해 배출행위를 철저회 규명하라.
다섯째, 대구지역 정치인들의 페놀사태 호도 행위를 규탄하며 시민들의 피해를 외면한 정치인들은 대구시민에 의하여 선거를 통한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경고한다.
여섯째, 대구시 당국이 페놀사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피해 배상에 소극적일 때에는 대구지역 시민단체들과 연대하여 단호히 투쟁한다.
두산전자의 행정심판 청구에 대한 규탄 성명
– 페놀 폐수를 방류하여 대구시 수돗물을 오염 시킨 두산전자가 1991년 4월 6일 대구지방 환경청에 조업정지 처분에 대한 이의가 있다면서 조업 정지 처분의 집행을 정지하는 행정 심판 청구를 제기하였다. 두산전자의 이러한 행정 심판 청구는 대구시민이 페놀 파동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고 이에 대한 이렇다할 대처 방안도 확립되지 않은 시점에서 페놀 사태가 발생한지 불과 20일 만에 고의적인 페놀 방류가 아니라는 책임 회피적인 이유를 들어 조업을 다시 재개하려고 행정심판을 한 경솔한 처사는 개탄을 금할 수 없다.
두산전자는 페놀 사태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행정심판 청구를 즉각 취소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또한 두산전자로 하여금 조업 정지 재개를 위한 행정심판 청구를 종용한 정부의 이중적인 환경정책을 개탄한다.
환경처의 조업 정지 결정에 대한 반박 성명
– 환경처가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에 입각하여 두산전자의 행정심판 청구를 수용, 조업정지 결정을 취소한 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이며 헌법상 보장된 시민의 환경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정부에 대해서는 조업정지 집행 결정을 즉각 취소할 것을 촉구하고, 두산전자에 대해서 ㄴ행정심판 청구를 취하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가 받아 들여지지 않으면 시민의 거센 분노에 직면할 것임을 엄중히 경고한다.
4월 26일 2차 페놀사태와 비산염색 공단 폐수 방류 사건에 대한 성명
– 정부는 페놀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 대구시장에 대한 문책을 단행할 것을 촉구한다.
– 검찰은 두산 전자 대표를 즉각 구속하여 공해사범에 대한 강력한 대처 의지를 천명하 라.
– 이윤 추구에 급급한 반사회적인 공해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을 범시민적으로 전개한다.
– 사태에 대한 철저한 진상을 조사하라.
5월 6일 수질 감시위원회와 환경오염 피해 보상 조정 위원회의 구성과 역할에 관한성명
첫째, 수질감시위원회 구성에 있어 1차 페놀 파동 당시 시민들의 막대한 피해 증상에도 불구하고 페놀의 무해성을 적극 주장하여 대구시 당국의 사태호도에 이론적 정당성을 부여했던 일부 대학교수들이 포함되어 있음은 유감이다.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감시위원회의 구성을 위해 이들 전문가를 교체할 것을 요구한다.
둘째, 환경 분쟁 조정위원회는 조속히 개최되어 신속하고 적정한 피해보상을 기하는데 만전을 기하라.
4. 예견된 사고, 원인은 인재
검찰 수사과정에서 두산전자는 1990년 10월 21일부터 1991년 3월 20일까지 무려 5개월 동안 1일 평균 1.7톤의 페놀 폐수를 방류하여 왔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런데 대구시와 대구지방환경관리청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월 1회 이상하기로 되어 있는 페놀 검사 의무 규정조차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페놀사건이 인재였음을 뒷받침하였다. 특히 낙동강 수계에는 그 이전에도 수돗물 페놀오염이 여러 차례 발생하였다. 먼저 1989년 8월에는 강정과 다사 취수장에서 클로로페놀이 형성되어 심한 악취가 나서 시민들의 항의가 있었는데, 당시 해당 취수장과 상수도본부측은 여름철 오염을 막기 위해 염소를 과다 투입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이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그리고 1991년 3월 2일부터 5일 사이에도 구미, 왜관 일원 주민들이 수돗물 악취를 항의하였는데 수질 분석 결과 0.004ppm의 페놀이 검출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페놀 오염 사고는 이미 여러 차례 발생한 것으로 페놀사건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다.
또한 검찰조사에서 대구지방환경청 관계자는 상시 단독반 활동 사항 일일 보고서를 허위로 기재한 혐의로 구속기소 되었다. 즉 90년 10월에 두산전자 구미 공장의 페놀 폐수 소각로 2기중 1기가 고장나 방치되어 작동하지 않았고, 공장 앞마당에는 폐수 드럼통이 야적되어 공장에 들어서기 1킬로미터 이전부터 심한 악취가 풍기고 있었는데도 관계자는 두산전자 구미 공장을 실제 확인하지도 않고 아무런 위반 사항이 없었다고 허위 일일 보고서를 작성하였던 것이다.
결국 두산전자의 장기간에 걸친 페놀유출에 대해 단속 점검해야 할 상수도 사업본부나 환경청 직원들이 직무를 태만한 결과 이 같은 페놀사건을 일으켰던 것으로 이는 명백한 인재였던 것이다.
5. 대구시의 페놀오염 수치 조작
대구시는 일관되게 ‘페놀농도가 음용수 기준치 이하로 악취가 나지만 인체에 무해한 수돗물 사건’으로 페놀사건의 성격을 주장하였다. 대구시는 페놀이 다사 수원지에 유입되기 시작한 3월 16일 09시 30분의 페놀농도와 3월 16일 14시 30분 달서구 본리동 보성 아파트 주민의 가정 수도전에 최초 급수된 클로로페놀 농도는 무시하고, 3월 17일 03시 30분에 측정한 다사수원지 원수의 페놀 농도 0.0035ppm을 근거로 사후 수습을 한 것은 명백한 사건 축소 은폐 기도라 할 수 있다.
계명대학교 김수원 교수는 다사 수원지 페놀 오염 농도 측정치가 0.003ppm으로 인체에는 큰 해가 없다고 말했고, 당시 이학노 전 상수도 사업본부장은 ‘클로로페놀은 인체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했을 뿐 아니라, 대구시장 명의의 3월 23일자 각 일간지에 게재된 ‘상수도 악취 발생에 따른 수도료 감면과 피해보상 신고 안내’공고에도 피해 신고 대상을 ‘악취로 인한 피해 식품’에 한정하는 등 대구시는 일부 전문가를 동원하면서 까지 일관되게 사건을 조작하려고 했다.
그러나 대구보건환경연구원이 3월 19일 측정한 다사수원지 원수 페놀농도 0.0055ppm, 4월 22일 2차 페놀사건 당시인 4월 23일 13시 40분경 페놀농도 0.096ppm, 3월 18일 경남 칠서정수장에서의 측정농도 0.25ppm, 3월 19일 고령에서의 측정 농도 0.110ppm 등을 볼 때 대구시의 측정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구시가 취한 일련의 조치들에서는 대구시가 주장하는 측정치를 스스로 부정하고 있었다.
대구시의 3월 26일자 상수도 악취 발생 경위 및 대책이라는 자료에 의하면 다사수원지 원수에서 음용수 기준치 이하인 0.0035ppm이 측정된 3월 17일 03시 30부터 06시 50분까지는 신천의 대형 배수 밸브를 열어 악취나는 물을 방류하고 안동댐에서 초당 30톤의 방류량을 초당 50톤으로 늘려줄 것을 요청했으면서, 3월 19일 음용수 기준치를 초과한 0.0055ppm이 검출되었을 때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3월 17일 03시 30분 다사 수원지 원수의 페놀 측정 농도가 대구시 당국이 비상조치를 취하지 않고는 도저히 안되는 정도의 엄청난 수치였음을 스스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6. 페놀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없다?
3월 18일 이학노 대구시 상수도사업본부장은 클로로페놀은 인체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하면서 페놀이 대구시 관내 벗어난 곳에서 유입되었기 때문에 대구시로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처음으로 페놀이 인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어 환경처장관은 국회 보건사회상임위원회에 제출한 자료에서 페놀은 유해성이 없다고 주장하엿다.
이처럼 관계기관이 페놀사건 초기에 페놀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없다고 강변하고 나온 것은 페놀피해 범위가 예상 밖으로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즉 관계기관이 페놀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인정할 수 없었던 곳은 페놀에 오염된 대구시민 160여만명이 다양한 페놀피해를 실제도 호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도법이나 수질환경보전법, 화학물질 관리법 등 관계 법규를 보더라도 페놀의 유해성은 의심할 바 없는 것이었다. 페놀사건 직후에 공해추방운동연합이 페놀의 유해성에 대해 금붕어 실험을 실시한 바 있다. 3월 21일 실시한 실험에서 페놀 허용 기준치 용액에 금붕어 2마리를 넝었더니 20분만에 발작을 일으켜 허둥대다가 3시간 45분만에 두마리 모두 죽어 물위에 떠올랐다. 다른 동물 실험에 의하더라도 페놀의 흡수경로, 농도 등에 따라 다양한 변화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습진, 염증, 유두종, 탈색 등 피부손상, 출혈과 심한 중독시에는 폐경색, 기관지 폐염, 농성 기관지염, 심근변성과 괴사가 있을 수 있고 지속적인 페놀 섭취는 신장에 실질신염, 혈구의 공포화를 가져온다고 한다.
당시 대구지역 시민단체가 4월 30일까지 접수한 피해 신고 건수는 모두 1,617건이었는데, 유형별로는 임산부 664건(유산 255건), 신체적 피해 205건, 물질적 피해 591건, 기타 157건으로 임산부 등 신체적 피해가 전체의 53.8%에 달하였다. 피해증상으로는 복통, 설사, 유산, 목이 타는 듯한 통증 및 피부 가려움증, 붉은 반점 등이었다. 즉 실질적인 시민의 피해 상황을 보더라도 페놀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이에 시민단체가 임산부에 대한 특별관리를 대구시에 강력하게 요청한 것은 당연한 요구였던 것이다.
7. 정부당국의 시각
대구지역에서 발생한 페놀사건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중아정부는 사태수습에 급급하여 과잉 반응을 보이면서, 사태가 수습된 후에 관련 책임자를 문책하고 장기적 대책을 수립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실체 1차 페놀파동 이후 여론이 잠잠해 지자 애초에 제시한 바와는 달리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낙동강 페놀 사건과 관련하여 “환경처장관과 대구시장을 문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그 책임을 묻지 않았다. 이는 공해기업에 대한 정부당국의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시적으로 과잉된 반응은 중앙정치가들이나 국회의원들에게도 나타났다. 페놀사건이 터지자 중앙의 정치가들 특히 국회의원들은 여러 방법으로 국민의 분노를 국회를 통해 정부에 전달하고자 했다. 심지어 각 정당 마다 조사단을 구성하여 현장에 보냈지만 실제 이들의 조사 내용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정부당국의 시각은 일관되게 나타났다. 먼저 정부는 두산전자가 조업 정지 처분 취소 행정 심판을 하자 아무런 고민없이 두산전자의 신청을 받아 들였다. 당시 환경처 행정심판위원회는 두산전자의 조업중단으로 전자제품수출이 큰 타격을 받고 있다는 경제계의 압력을 받고는 두산전자에 대한 조업정지를 17일만에 변칙적으로 해제한 것이다.
이 결정이 있기까지 당시 상공부장관은 환경처장관에게 수차례 전화를 걸어 직권으로 조업정지를 해제해 달라고 통사정하였고, 경제기획원장관은 두산그룹회장을 불러 조업정지 이의신청을 내도록 설득하여 환경처의 조업 정지 해제 결정의 근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는 후문이 있었다.
페놀사건에 대한 정부의 시각과 환경 문제에 대한 정부당국의 정체를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정부는 애초부터 환경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90년 11월 전경련은 환경청에 압력을 가해 하천수질환경 기준 항목에서 화학적산소요구량(COD)를 빼도록 했다. 산업활동을 저해하는 환경정책은 반대한다는 전경련의 입장이 정책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부의 태도로 결구 조업 해제후 14일만에 두산전자에 의해 또다시 페놀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2차 페놀사건이 그것이다. 국민들의 분노와 실망이 극에 달했고, 환경단체의 조직적인 항의행동에 밀려 결국 정부는 환경처장관과 차관을 전격 해임하였다.
8. 과실로 인한 페놀사건
페놀사건은 당시 대구시가 설정한 신고 마감 기한인 4월 5일 현재 총 1만 2천건 신고에 피해액만도 24억원에 이르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검찰은 대구시청 관계 공무원의 불구속 입건, 대구지방환경청 직원 7명 구속, 두산전자 직원 구속 등의 사법적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검찰은 두산전자의 고의적인 페놀 방류를 밝혀 내지 못하고 하급직원에 한정하여 형사 책임을 묻는 선에서 수사를 종결하여 명확한 사건 원인 규명을 이루지 못해T다. 초기에 검찰은 두산이 비밀배출구를 통해 고의로 페놀을 방류하였다는 강한 혐의점을 두고 수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초기의 강경한 검찰수사는 시간이 갈수록 느슨해졌고 결국 그것이 비밀배출구가 아니라고 두산의 손을 들어주고 말았다. 그런데 검찰은 비밀배출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두산이 서둘러 그 비밀배출구를 폐쇄한 것을 인지하면서도 이에 대한 수사는 진행되지 않고 고의성이 없는 과실행위로 수사를 일단락한 한 것이다.
또한 두산은 당시 소각기 2기중 1기가 90년 10월 경부터 줄곶 고장이 나 있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였을 뿐 아니라 소각로 1기로는 페놀 폐수를 처리할 수 없다는 점을 검찰 수사 결과 확인하였으면서도 고의성이 아닌 과실에 의한 누출이었다고 하는 것은 의문이라 할 것이다.
9. 일반 시민들의 피해에 대한 대응
대부분의 대구 시민을 포함하여 낙동강 수계에 상수원수를 의존하고 있는 영남지역 주민들은 페놀오염으로 인한 수돗물 악취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로 인해 페놀오염을 유발한 기업과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 정부기관에 대해 시민들은 많은 불만을 가지고 항의하였으며 대응 과정에 대해 크게 불신하게 되었고, 이러한 불신은 그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표1>
<표 1> 페놀사태 이후 기업 및 정부의 대책에 대한 만족도( ):%
이러한 시민들의 불만족은 우선 수돗물 오염으로 인해 일상생활의 곤란은 물론 음식점, 다방 등지에서 영업에 막대한 지장이 있다는 호소와 보상 요구로 나타났으며, 오염된 물로 인한 환자 발생이 보고되기도 했다. 대구시는 시민들의 이러한 불만과 보상요구가 치열해지자 피해보상 신고를 접수받았다. 처음 몇 일간은 처음 당하는 환경오염사태였고 또한 정부의 피해보상에 대한 불확실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 어느 정도 피해를 입었는가에 대한 무지 등으로 사태가 인지되고 15일이 경과된 1991년 3월말까지 대구시에 접수된 신고건수는 2,424건이였으며 금액으로는 1억 6420만원(질환신고 110명의 보상요구는 제외)정도에 불과했다. (표 2 참조) 그러나 사태의 심각성과 피해 가능성이 확대되면서, 그리고 한달이 지난 이후 4월말에는 피해보상 신고는 건수로 5.5배 정도 늘어서 13,455건, 금액으로는 무려 100배 이상 증가했다. 이 가운데 페놀로 오염된 수돗물로 인해 유산을 하거나 또는 기형아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공유산을 한 임산부 131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표 2> 페놀사태로 인한 피해보상신고 상황(단위 : 건, 백만원)
그러나 사고 발생 후 근본적인 패해보상 문제는 거의 해결되지 않았고, 특히 두산 측의 소극적 자세와 대구시의 무책임한 행정으로 페놀피해 임산부모임은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등 피해보상이 장기화되고 말았다. 당시,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의 자료에 의하면, 비교적 피해 정도가 가벼운 1만 3,279건의 배상요구(약 14억 6천여만원)에 대해서는 지방환경분쟁조정위에서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페놀로 오염된 물을 마시고 입은 신체적 피해(치료비) 보다 정신적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사례들은 이러한 조정에 불복하여 거의 중앙환경분쟁조정위로 재정신청을 내었다.
1,2차 페놀파동을 겪으면서 대다수의 국민들은 수돗물에 대한 불신이 심각했다. 사고 당시 약수터 등에 수백명씩 몰리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피해 주민들이 이에 대한 집단적인 반대 운동이나 보상 요구 보다는 개인주의적 차원에서 물위기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페놀사건 시민대책위가 구성되고 책임자 고발과 두산제품 불매운동과 소비자운동 등을 통해 강력하게 대응하고자 하였고 피놀피해 임산부 모임은 민사소송을 제기하여 법정투쟁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대부분의 시민들은 자발적이고 공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 수동적이고 개인적으로 문제를 회피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10. 페놀피해 임산부 문제
(1) 경과
페놀에 의하여 피해를 본 800명의 임산부들이 대구시 환경분쟁조정위원회에 피해 배상을 신청하였으나, 피해에 대한 인과관계의 증명이 어렵다는 이유로 기업의 사회적, 윤리적 책임의 차원에서 실비변상만이 인정되었다. 그 후 60명 가량의 임산부들이 조정에 불복하여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에 재정신청을 하였고, 그 심사결과에서도 페놀오염과 임산부 피해의 인과관계를 인정되지 않자 92년 말에 16명의 임산부들이 대구 지방법원에 민사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93년 2월부터 지루하게 공판이 진행되었으나 사건당시 수돗물 중 페놀과 클로로페놀의 농도를 정확하게 알 수 없고 또한 이것이 태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실정이어서 재판부의 판결이 쉽게 이루어지 지 않다가 결국 재판부의 조정 결정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2) 환경분쟁조정의 문제점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에서 조정의 근거로 삼았던 경북대 보건대학원의 박정한 교수가 작성한 ‘대구시 상수도의 페놀오염이 임신결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역학조사’는 몇가지 심각한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첫째 조사방법에 있어서 페놀노출지역과 비노출지역을 비교하였는데 지역마다 생활 및 교육수준과 주위 환경이 다르므로 서로 비교하기는 어렵고 오히려 노출지역을 대상으로 페놀사태 이전의 자료와 이후의 자료를 비교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데 이를 감안하지 않은 것이었다.
둘째는 5개 종합병원만을 대상으로 유산자들을 조사하였는데 유산의 특성상 많은 사람들이 개인병원을 이용하고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페놀오염으로 인한 임신초기 유산자들이나 심리적 영향으로 인공유산을 한 사람들의 상당수가 그 자료에서 누락된 것이었다.
셋째 사건 당시 대구시가 발표한 페놀오염 수치가 논란의 여지가 많은 데도 불구하고 그 수치를 근거로 역학조사의 결론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상기 역학조사에서 언급한 상수도 원수중의 페놀의 농도는 0.005ppm이었는데 이는 대구에서 96.3㎞ 떨어진 하류지역인 칠서정수장에서 조사한 낙동강 원수중 페놀농도 0.25ppm보다 훨씬 낮은 수치였다.
어찌 상류의 수치가 하류의 수치보다 낮을 수가 있는가? 그 이유는 대구시에서 발표한 수치는 이미 사건 발생후 10여시간이 경과한 후의 수치라서 최고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역학조사는 두산전자가 박정한 교수에게 의뢰를 한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사건의 가해자가 의뢰한 역학조사에 대한 신뢰성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었겠는가?
이상에서 살펴 볼 때 경북대의 역학조사는 전반적으로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고 이를 근거로 인과관계를 부인한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의 조정결과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3) 페놀수치의 추정
인과관계 확인에 가장 필요한 것이 그 당시 수돗물 중에 들어 있던 페놀 및 클로로페놀의 정확한 농도였다. 그러면 과연 그 당시 다사수원지의 원수중 페놀농도는 얼마였으며 수돗물 중 페놀과 클로로페놀의 농도는 얼마로 추정할 수 있는가?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가 페놀사건 당시의 페놀농도 추정에 대한 전문가의 의견을 연세대 정용 교수에게 요청하였는데 그 회신에 의하면 30톤의 페놀이 1일간 유출될 경우 원수중 페놀의 오염도는 91년 3월 12일-20일 간에는 0.1276-0.261ppm이라고 추정하여 대구시가 발표한 0.04ppm(원수중 허용 페놀농도는 0.05ppm)과는 천양지차임을 보여주었다.
또한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에서 1992년 8월 27일 있었던 대구시 페놀분쟁조정을 위한 관계 전문가 워크숍회의록에 의하면 당시 참석했던 국립보건원 수질검사과장 김준환씨의 발언 내용중 ‘실제로 페놀량이 3ppm, 6ppm으로 나왔지만 페놀자체로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그것이 클로로페놀로 될 경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여 대구시가 발표한 페놀수치가 허위였음이 드러났다.
따라서 재판부에서도 이 발언을 근거로 제시받아서 페놀수치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렸어야 했었다. 그리고 박교수보다 앞서 발표한 경북대학교 보건대학원의 김두희 교수가 작성한 ‘대구시 상수도 페놀오염에 대한 역학조사’에서도 만약 30톤이 4일간에 걸쳐 흘러나왔다면 다사 수원지에서 감지할 수 있는 페놀수치는 약 1.9ppm이 된다고 하였다.
또 같은해 4월 20일 발생한 두산전자의 2차 페놀사태의 경우, 0.3톤이 유출되었는데 4월 23일 다사수원지의 오염수치는 0.096ppm이었다. 1차 페놀사태의 경우 2차 페놀사태보다 무려 100배나 많은 30톤이 같은 시간동안 유출되었는데 오히려 이보다 낮은 수치가 어떻게 나올 수 있었겠는가?
대구 페놀사태와 유사한 외국의 페놀사건은 1984년 1월 영국의 북웨일즈에 있는 디강이 공장에서 흘러나온 페놀로 오염되어 약 200만명에게 피해를 입힌 적이 있다. 그 당시 제이비스 등이 보고한 바에 의하면 북웨일즈에서 원수중 페놀은 0.1ppm이며 정수 후 수돗물 페놀농도는 0.01ppm이고 수돗물의 염소 소독으로 인하여 발생한 클로로페놀(3가클로로페놀로 가정)은 0.039ppm이었다고 한다. 이는 원수페놀농도의 10%정도가 정수한 수돗물에 남게되고 클로로페놀은 39% 생기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를 바탕으로 연세대 정용 교수의 페놀추정치를 적용하면 대구시 페놀사태 당시 수돗물중의 페놀과 클로로페놀의 최고추정농도는 각각 0.026ppm, 0.102ppm이다.
만약 경북대학교 보건대학원의 김두희 교수가 추정한 원수중 페놀농도 1.9ppm을 적용한다면 그 농도는 각각 0.19ppm, 0.74ppm이다. 그런데 세계보건기구(WHO)가 정한 페놀과 클로로페놀의 수돗물 최대 허용치는 0.001ppm이다. 특히 2,4,6-트리클로로페놀의 경우 발암성 표준량은 0.012ppm이다. 따라서 경북대의 추정치를 근거로 한다면 WHO의 최대허용기준치를 수십배 상회하는 농도였다.
(4) 페놀피해 임산부 대책위 구성
·대책위원장 : 서홍길 (대구 공추협 의장)
·집행위원장 : 이재용 (대구 공추협
·피해자대표 : 김성분 (페놀피해 임산부 모임 회장)
·법정 증인 : 권용준 (효대 약물학 교수)
조무환 (영대 화공과 교수)
·변 호 사 : 김준곤
최봉태
송해익
서석구
(5) 소송 일지
1991년
·3월 16일 페놀사건 발생
·7월 4일 피해자 첫 모임
·7월 중 두산이 배상 못하겠다는 취지로 지방조정위에 조정신청을 냄
·11월 22일 대구시 환경분쟁조정위원회의 조정안 받음
환경분쟁조정위원회 조정안 – 출산 : 20만원, 유산 : 50∼100만원, 피해 사실의 유무를 밝히지 못하고 기업의 환경의식 결여에 책임을 물어 배상하게 함.
1992년
·1월 피해 임산부 모임에서 중앙환경분쟁조정위에 재정신청을 함
– 100여명은 지방조정안에 거부한 사람과 30여명의 신규피해접수자
·5월 12일 정신적 피해 불인정에 대한 1박 2일 환경처 앞 단식농성
·9월 30일 중앙환경분쟁조정위 재정결과 받음.
– 인과관계가 없음으로 배상 불필요 판정을 내림. 그의 근거는 두산의 용역의뢰에 의한 박정한 (경북대 의대교수)의 역학조사결과와 재정위 자체의 8개 의료기관 회신문을 근거로 함. 문제점은 당시의 실제적인 페놀오염정도가 밝혀지지 않았음, 박정한 교수의 역학조사를 검토없이 100% 인정한 점, 의료기관의 자료를 편파적으로 적용한 점. 재정결과 : 인공유산자 28명만 여론의 영향을 미미하게 인정하여 각 38만원씩 배상결정
·11월 말 15명이 재정결과에 불복하고 두산그룹과 대구시를 상대로 민사소송제기
1993년
·2월 5일 첫 공판 – 인정신문 진행
·6월 21일 감사원으로 부터의 재정결과 자료를 받음
– 재정과정이 편파적이었음이 드러남
·10월 국정감사에서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장이 정신적 피해 불인정은 잘못이었다는 진술을 함
·10월 25일 8차 특별심리 진행
– 인공유산 후유증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피해자와 기형아 출산 피해자 등을 심리
1994년
·1월 17일 권용준 교수 증인신문 심리
– 재정결정의 근거가 된 2가지 사실의 부상성을 밝힘.
·2월 21일 조무환 교수 증인신문 심리
– 페놀사건 당시 오염농도가 대구시에서 공식 발표한 것만으로 규정하는 것 은 부당함을 밝 힘. 감사원 자료와 조무환 교수의 추정치 및 대구 하류 지역 인 칠서와 수서지역 오염농도 발표를 인용함. 두산측 반대신문을 못함
1995년
·2월 28일 대구지방법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 조정판정으로 소송을 끝냄.
– 재판부의 조정 내용은 ‘두산전자는 대기업으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감안하여 대구시를 통해 1억2천만원을 페놀피해임산부모임에 지급하고 대구시는 위로금조로 2천만원을 지급하라. 단 , 두산전자와 대구시가 페놀사태에 대한 법률적 책임을 시인한 것은 아닌만큼 당사자 쌍방은 물론 어느누구도 조정결과를 가지고 페놀사태의 법적 책임의 존부 범위에 대한 근거로 삼을 수 없다’ 라고 판결함.
11. 페놀사건의 결과
페놀사건은 전국적으로 공해 문제를 인식시킨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두산 제품 불매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두산그룹이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기업으로 하여금 공해에 대한 시민 반응에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각인시켜 주었다. 나아가 페놀사건은 대기업 전반의 산업폐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국민 스스로도 자신이 버리는 생활하수가 심각한 환경오염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당시 여야를 막론한 정치인들은 다사수원지를 경쟁하듯이 방문하여 자신이 사진 한 장을 언론에 싣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또한 시민들로 구성된 시민대책위원회의 활동 과정에서 공무원이시민운동 단체 관계자를 구타하는 등 권위주의적 행정관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우리 정치와 행정의 환경인식을 단적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91년 3월 29일자 동아일보 사설은 “이번 페놀사태에 대한 국민적 응징은 전국 규모라는 점에서, 그리고 해당 공해기업의 전 제품을 대상으로 한 응징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환경운동 사상 최초의 대규모 저항으로 기록될 듯하며 앞으로도 환경보전 시민운동에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즉 페놀사건은 우리나라 시민운동 특히 환경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연 계기가 된 것이다.
이제 10년이 흘렀다.
그동안 수조원의 천문학적인 예산을 들여가며 낙동강을 살리려는 정부의 노력도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언론의 관심도 일회성에 지나지 않고, 국민들의 관심도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있다. 오히려 낙동강을 두고 자신의 이해관계만을 관철시키려는 지루한 지역 갈등만 증폭되고 있을 뿐이다.
페놀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한번 돌이켜 봄으로서 낙동강을 살리기 위한 대장정을 다시 시작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