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칼럼] 이상한 동네에 다녀왔다

2020년 9월 1일 | 녹색칼럼, 활동


지현영 변호사(사단법인 두루 변호사, 녹색법률센터 운영위원)
 
[녹색칼럼] 이상한 동네에 다녀왔다.
 
당초 한솔초 요리실로 예정된 회의는 교장실로 변경되었다. 단촐한 교장실 한쪽 벽은 교사들이 그린 마을 지도와 아이들이 그린 산새 그림들이 붙어 있다. 각 단지의 입주자 대표님들, 공대위 대표님, 전대표님, 교장선생님, 교무부장님, 전 교무부장님, 학부모, 어린이가 익숙한듯 한 테이블에 빙 둘러앉았다.
주민설명회에 와서 향후 소송에 대해 설명해달라는 요청이 주던 긴장감은 사과주스를 홀짝거리며 슬슬 풀려간다. 수곡동 사람들은 각자 소개를 하기까지 누가 각 직함을 가졌는지 짐작되지 않는 그냥 수곡동 사람들이다. 5년간 투쟁 해왔다는 그들에게 독기는 보이지 않는다. 위계라고는 없는 분위기속에 얼음물을 나눠마시며 너나 없이 차근차근 말을 보탠다.
도시공원일몰을 핑계 삼아 급하게 추진되고 있는 민간공원 특례사업은 공원으로 지정된 토지의 30프로에 아파트를 짓게 해주는 대신 민간 사업자가 공원을 사비로 조성해야 하는 이론상으로 합리적으로 보이는 사업이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감당하기 위해 터널과 도로로 산을 뚫고, 학교를 무리하게 확장하려고 숲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공원으로부터 단절시키고 새 아파트 주민의 뒷공원으로 변모시킨다.
수곡동은 작은 평수의 아파트들과 영구임대아파트로 이루어진 동네이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도 호젓하게 공원과 더불어 살 수있는 이 동네에서 매봉산은 마을사람들의 즐거움이다. 어디서나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낮은 능선의 산과 공원, 솥밭에서 나무와 버섯을 관찰하는 어린이들, 해맞이를 할 수 있는 스카이라인.
수곡동 사람들이 동네를 보여주겠다며 다 같이 길을 나섰다. 둘러보니, 공원은 마을 사이를 굽어 흐르기도 하고 바깥으로 포근히 감싸 안고 있기도 했다. 부지 설명 중간중간 메타세콰이어길과 솔나무와 파랑새를 자랑스러워한다. 마주치는 모든 이들과 놀랍도록 다 아는 체 하는 것을 보며 대표성을 우려하던 마음은 사라진다. 아이든 .어른이든 똑같이 반가워 하고, 개발을 찬성하는 주민도 예외는 아니다. 서울에서 온 변호사님들이라고 이야기하느라 여러번 걸음을 멈추는데 반대편주민이라고 속삭이시면서도 호기심을 평등하게 채워준다. 지나다 보이는 아파트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며 놀고 있는 두 할머니를 보며 뭐 이런 이상한 동네가 있나 혼란이 정점을 향했다.
그리고, 이 보드랍고 순한 투쟁가들이 사는 마을을 진심으로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부드러운 능선이 가파르게 깍인 경사면이 되는 날에는 수곡동 사람들도 변할것만 같아 슬프다. 잡담하며 보여주기 시작한 사진을 맨 끝 사람까지 소외되지 않게 돌려보고, 삼겹살집에 앉자마자 고기를 안먹겠다는 말에 ‘아?그거하시는구나?’하고 두 말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동백꽃필무렵’에 나온 메타세콰이어길이 있는 초등학교의 학생들은 제친구로 지정한 잠두봉의 나무들이 잘려나간 이야기를 교장선생님께 들려주며 울었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 잘려 나간 나무의 자리에 드러선 잠두봉더샵아파트 뒤로 걸린 노을이 나무의 핏자국처럼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