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영 변호사의 녹색서재] 학습능력이 부재한 인류를 보는 절망감 – 체르노빌 생존지침서

2021년 5월 3일 | 녹색칼럼, 활동

학습능력이 부재한 인류를 보는 절망감

<체르노빌 생존 지침서>를 읽고

 

이희영 변호사(법률사무소 지후, 녹색법률센터 운영위원)

 

핵과 방사능의 파멸적 영향에 대해 언제부터 이렇게 강박에 가까운 관심이 생겼는지, 그래서 안 그래도 그다지 낙관적이지 못한 성향에 묵시록적인 세계관까지 더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관련해서 기억나는 가장 먼 과거는 고등학교 때 버스를 타고 가는데 라디오에서 프랑스가 남태평양 어디에선가 핵실험을 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던 일이다. 그때도 요즘처럼 극심한 분노와 무력감을 느꼈다.

 

핵이나 방사능과 관련하여 전문적인 과학, 의학의 최신 연구 결과를 따라갈 능력은 없으니 저널리스틱하고 사회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는 저술이나 영상들을 찾아보고 있는데 <체르노빌 생존 지침서>도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은, 핵발전소에서 대형 사고가 날 경우 그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존 가능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실용 지침들을 담고 있을 것 같은 제목과는 달리, 재난사변경사 등을 연구해온 학자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이탈리아, 미국 등 세계 각지의 문서고를 샅샅이 뒤져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관련자, 피해자들을 면담한 자료를 토대로 체르노빌 사고가 미친 광범위한 환경적, 의학적 영향을 검토하고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핵 사고에서 생존하고, 이러한 재난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지침을 주는 면도 있다.

 

저자는 체르노빌이 사고 현장에서 100km 떨어진 키예프(사고 당시는 소련,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400km 떨어진 민스크(벨라루스)까지 오염시켰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나마 인민 동원력은 끝내줬던 소비에트연맹이 노동자와 조종사들을 동원해서 불타는 원자로에 콘크리트를 덮어씌우고 주변을 제염한 게 그 정도고 사고 현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과 조종사들은 초고농도 방사능에 노출돼 대부분 조기 사망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현재 진행형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체르노빌 사고와 그 규모가 비슷하다고 규정된 후쿠시마 핵 사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원자로에 콘크리트를 쏟아붓고 또 2016년에 새로운 금속 차폐막을 발전소 위에 덮어씌운 체르노빌과는 달리 후쿠시마의 사고 원자로에서는 근처에서 노출시 1시간 내에 사망에 이르게 하는 초고농도 방사선이 여전히 뿜어져 나오고 있다. 저선량피폭의 경우에도 부정적인 결과가 하루이틀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 법적경제적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학계에서도 아직 관련 연구결과가 많지 않은 인과관계 규명 등 아주 길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해서, 악영향이 없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런데도 핵발전소 사고 현장으로부터 불과 70km 떨어진 후쿠시마 내에서, 그것도 방사능 제염토를 쌓아 놓은 야적장 바로 옆에서 야구 경기를 열겠다고 하고, 전세계에서 참여할 선수단에게 후쿠시마산 식품을 제공하겠다고 공언하는 올림픽이 국제사회에서 보이콧 되거나 어떠한 반대의 목소리도 없이 열릴 예정이다(물론 지금은 코로나라는 또다른 변수로 인해 도쿄올림픽의 개최 여부가 불투명해지긴 했다).

 

게다가 일본이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방사능 오염수를 해양에 배출하기로 결정하자, 국제사회는 이를 막거나 규제하기는커녕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나서서 오히려 두 팔 벌려 환영한다는 뜻을 표명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세계가 과연 표면적으로라도 합리적 이성에 의해 작동되고 있는지 회의가 짙어졌다.

 

일본이 후쿠시마의 방사능 오염수 방류 결정에 대한 주변국들의 반대에 반론을 제기하는 과정에서 한국 역시 그동안 핵발전소에서 발생한 대량의 삼중수소 오염물질을 바다와 대기 중에 방출해 왔다는 점도 밝혀졌다.

 

후쿠시마 사고를 대하는 일본 정부와 국제사회의 태도를 보면, 체르노빌 관련 문서들이 기밀해제 되어 이 책이 나오기까지 사고 발생으로부터 수십 년이 걸렸던 것처럼, 후쿠시마 사고의 영향과 전모가 드러나기까지는 또다른 수십 년이 필요할 것이다.

 

역사학자인 저자는 체르노빌이라는 구체적, 개별적 핵 재난의 여파를 겪어온 사람들의, 지금까지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삶을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제2, 제3의 체르노빌, 후쿠시마 사태를 경고하여 이 책을 읽는 우리들과 후세가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거나 실천하길 바라면서 이 책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나와 내 가족, 주변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는 악영향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나는, 우리는 예외일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핵발전소를 늘리고 핵폐기물을 무책임하게 투기하는 현실이 책의 내용과 중첩되면서, 인류는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고 환경과 생태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의 힘은 미약하기만 한 게 아닌가 하는 뿌리 깊은 절망감이 가시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