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소송센터 정책팀장
김 혁
1. 공익법률상담소 활동
태안읍에서 숙소가 있는 천리포 해수욕장으로 들어가는 막차는 저녁 7시 30분이면 끊긴다. 막차시간을 맞추기 위해 업무 마무리와 저녁 식사시간은 항상 조급하다. 버스 안에는 ‘맨발의 청춘’, ‘병태와 영자’, ‘바보들의 행진’ 등 70년대 영화 포스터들이 붙어있다. 버스가 왕복 2차선 좁은 도로 위를 모항, 신두리, 만리포를 지나 천리포까지 지루하게 달리는 동안 영화 포스터는 좋은 눈요깃감이 된다. 국내 유일의 해양국립공원이 있는 이곳까지 와서 때 지난 포스터 따위나 보고 있느냐고 궁금할 것이다. 하지만 낮에 편안한 안식이 되어주던 오밀조밀한 해안선과 바닷가 마을 풍경은 밤이 되면 조명등 하나 없는 이곳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적막감만이 산등성이를 타고 바다 어딘가로 짐작 되는 곳곳으로 감돌 뿐이다. 언젠가 40분 정도 소요되는 숙소로의 퇴근길. 도로위로 불쑥 튀어나온 고라니로 머리끝이 주뼛 선적이 있었다. 갑작스런 고라니의 출현에 놀란 것은 우리 뿐 인 듯 했고 오히려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아 보이는 다른 승객들이 신기했다. 버스기사는 고라니를 본건지 못 본건지 속도조차 줄이지 않아 지켜보는 우리들을 더욱 가슴 졸이게 했다.
우리가 사용하던 숙소는 원래 관광객들을 위해 제공되던 민박집인데 지역 주민이 우리를 위한 공간으로 내어주었다. 태안읍에 있는 공익법률상담소로 출근 할 때면 기름유출사고 방제작업 차량들과 좁은 길 위에서 늘상 마주친다. 우리는 공익법률상담소에서 기름유출사고로 인한 피해 실태 조사, 피해자로부터의 피해접수, 피해배상의 올바른 법률적 해결방안을 홍보하고 교육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피해주민들은 해양수산부와 충청남도에서 개최하는 피해보상 설명회에 참석 해봐도 뜬 구름 잡는 소리로만 들리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겠다며 상담소의 문을 두드린다. 상담소에서 상주하고 있는 이들은 환경소송센터 활동가, 자원 활동을 하러 온 사법연수생과 법대생들이다. 이들은 환경전문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피해주민들을 상담하고 있다.
2. 지역의 현실
삼성중공업 서해기름유출사고가 있은 지 70여일이 지났다. 그동안 생계를 비관한 3 명의 피해주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한분이 분신을 시도했으며, 손가락을 잘라 생계지원비에 대한 울분을 표현하신 분도 있었다. 공익법률상담소로 기름을 배달해 주시는 분은 최근에 친구를 잃었다고 한다. 이번 일 때문에 홧술을 많이 마신 날 음주운전을 하다 교통사고가 났다고 한다.
바다가 죽자 자신의 소중한 삶마저도 송두리째 버리려고 하는 사람들을 통해 이들에게 바다란 어떤 존재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태안에서 경제행위가 가능했었던 것은 바다라는 거대한 삶의 터전이자 자원의 보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작업한 후 나오는 것을 가공하고 유통시키는 것으로 부의 확대재생산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해삼, 멍게, 굴을 종묘하면 뿌린 만큼 거둘 수 있었고, 노인들은 반나절 소일거리로 갯일을 하면 약주를 위한 안주는 물론이고 용돈까지도 챙길 수 있었다. 주민들이 사업을 본격적으로 벌이기 시작한 건 서해안 시대가 열리면서다. 수도권에서 밀려들기 시작한 엄청난 관광객의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지역에는 펜션과 음식점들이 난립하기 시작했다. 무리를 해서라도 은행 대출을 받거나 그마저 안 되면 사채라도 끌어 들여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제 빚을 좀 갚아나가기 시작하고 생활이 안정화 단계에 들어섰다고 안도할 때쯤. 느닷없이 기름폭탄이 터졌다. 바다의 죽음으로 태안과 서산을 잇던, 그리고 서산과 외부를 연결하던 유통의 흐름과 경제 고리들이 원천적으로 차단당했다. 해산물 수요가 최고의 정점에 이르는 설 명절을 앞두고 이런 일이 터져버린 것이 무엇보다 뼈아팠다. 물량이 없어서 제사상에 오를만한 것은 부르는 게 값이었고, 피해가 그나마 적은 지역에서 양식되었던 해산물은 약간의 기름 냄새에도 불구하고 시장에 나왔다. 주위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명절 설을 지낼 수 있는 최소비용을 그렇게라도 마련해 보려는 절박한 몸부림이었다.
3. 주민 피해보상의 문제점과 대안
태안지역에서 피해보상에 관한 얘기가 나올 때면 여러 가지 숫자들이 등장한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숫자는 ‘3000억 배상한도’이다. 이 금액은 국제유류보상기금(이하 IOPC펀드)에서 책정하고 있는 것으로 위법행위를 하지 않아도 인정되는 이른바 ‘무과실책임’에 의해 책정되는 금액이다. 만약 우리나라가 2004년도에 ‘추가 기금 배상에 관한 협정’에 가입만 했어도 이 금액은 1조원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조선업에 비중이 큰 우리나라가 시프린스 호 같은 대형 참사를 경험했음에도 OECD 대부분의 해양 선진국들은 가입한 이 협정에 가입하지 않은 것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다. 현지에 긴급하게 사무실을 개설하여 난립하고 있는 로펌들은 이 ‘3000억 한도’ 내에서 손쉽게 돈을 벌 요량으로 피해 어민들을 모집하고 있다. 대형 로펌 들이 이번 사건을 맡게 되면 수임료만 최소 10%선이 될 것 같다. 12월 30일부터 전남 해안까지 유입된 타르덩어리로 인한 피해만도 1,000억이 넘고, 지금까지 쓴 방제비용만 1,500억이 넘는다. 이 비용들도 모두 3,000억 보상 한도에 포함된다. 수없이 난무하는 숫자놀음 속에 지역주민들에게 돌아갈 비용은 고사하고 환경복구비용으로 사용될 금액도 턱없이 부족할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런 현실에서 간과되고 있는 중요한 진실은 없을까?
항만당국과 예인선 그리고 부선 간에 왜 교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풍랑주의보가 내려진 가운데 왜 삼성 중공업 예인선은 무리하게 크레인을 경남 거제로 끌고 가려 했는지, 왜 선박 소유주는 소환하여 조사하지 않았는지, 왜 항해일지를 조작하려 했는지 등의 질문들은 형사재판에서 쟁점이 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삼성중공업 크레인을 연결하는 와이어선이 허위로 기재된 서류로 사용허가를 받았고, 사고 당시 예인선 선두에 선장이 자리에 없었다는 새로운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새로운 사실들은 하나의 진실을 이해하는 조각그림이다. 그리고 이 진실은 앞으로 태안 바다와 지역주민들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상법’ 769조는 “선박 소유자 자신의… 손해발생의 염려가 있음을 인식하면서 무모하게 한” 행위로 말미암은 피해에 대해서는 책임제한이 배제된다고 말한다. ‘무모하게 한 운항’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 가해 기업의 중과실이 인정되고 가해기업은 배상한도를 넘어 완전한 복구와 완전한 보상을 위한 무한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이번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하여금 사고가 일어나기 전처럼 되돌려 놓으라고 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검찰에서는 삼성중공업을 업무상 과실로 인한 쌍방과실이라고 결론 내렸기 때문에 삼성중공업을 상대로 중과실 책임을 묻는 별도의 민사소송이 있어야 한다. 현재 시민사회단체 법률대책회의는 이 활동을 위한 별도의 소송대리인단을 조직 중에 있다.
4. 시간과의 싸움
삼성중공업의 중과실 책임을 밝혀내기 위한 그 오랜 여정에서 가장 힘든 것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당장 생활고에 시달리게 될 피해주민들은 IOPC 펀드나 가해기업과의 합의에 강한 욕구를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생계지원금을 두고 발생하고 있는 혼란들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이것은 지난 1995년 시프린스호 사례에서 이미 경험했던 바이기도 하다. 당시의 재산상 손해는 1,500억원에 달했지만 실제 청구된 어장피해 액수는 735억 정도였고, 이 가운데 주민들이 받을 수 있었던 피해배상액은 고작 150억원대 수준에 불과했다. 이는 IOPC가 요구하는 기준들이 지역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너무나 엄격한 것이기도 했지만 가해 기업과 피해 주민사이에 오랜 법정싸움에서 지친 상당수 주민들이 가해 기업 측과 합의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누락된 피해보상액은 결국 고스란히 지역주민들이 떠안게 되었고, 생태계 복구의 미비는 현 세대와 미래세대가 져야할 부채로 남았다. 반면 프리스티지 호의 사례에서는 스페인과 프랑스 정부가 조속한 선지급을 통해 피해자들의 중재자로 나섰기 때문에 오랜 법적공방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국가가 선지급을 통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었던 사례이다. 이번 2월 26일 국회 본회의 상정을 앞두고 있는 ‘태안지원 특별법’에 환경단체들이 국가 선지급을 의무조항으로 요구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특별법은 주민들이 신속하고 합리적으로 국가로부터 선지급을 받을 수 있도록 실효성 있는 법안이 되어야 한다.
이번 삼성중공업 기름유출사고는 사회구조적인 문제이다. 자본, 정보, 권력을 가진 쪽은 사고를 직접 일으킨 가해 기업이거나 이를 방치하거나 초기대응에 실패한 정부로서 사건 전반에 책임을 져야할 이들이다. 문제의 원인제공자들이 일만 페이지가 넘는 사건경위와 조사보고서라는 풍부한 정보를 가지고 책임을 회피하거나 도망가기위한 전략과 전술을 짜고 있는 동안 피해자들 손에 쥐어진 것은 4장의 검찰 조사결과 중간발표 요약본과 언론에서 흘리는 정보밖에 없다. 무엇보다 피해자들은 증거보전절차를 통한 피해액 산정조차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비용이 없어 유실되어가는 증거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이제 주민들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 할 때다. 이 와중에 ‘삼성중공업 기름유출사고’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오히려 급속도로 식어가고 있다. 그 이유가 삼성의 광고에 목을 매고 있기 때문이 아니길 바란다. 언론이 계속 지역의 현실을 알려내지 않는다면 시민들의 관심사에서도 조금씩 잊혀져 가게 될 것이다.
어느 날 언제나처럼 막차를 타고 천리포에 있는 숙소로 가던 길. 또 다시 고라니를 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로드킬로 처참하게 죽어있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의 무신경함과 무관심이 결국 고라니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한번 쯤 생각해 봐야겠다. 우리도 지금 태안주민들을 또 다시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건 아닌지를.
삼성중공업 기름유출사고 관련 소송이 진행중인 법정
<민주화 운동 기념사업회 기고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