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법률센터 방문 후기_ 어린 시절 감수성과 꿈의 연장선에서

2011년 4월 25일 | 활동소식

 

                                                  어린 시절 감수성과 꿈의 연장선에서

전미영(민변 노동위원회 6기 인턴, 대학생)

4월 18일, 오전 10시엔 KT 관리자의 양심선언 기자회견에 갔었고, 노사관계 모니터링을 마친 후 혜화역에 있는 녹색법률센터에 다녀왔다. 녹색법률센터에 대한 첫인상을 그리자면, 작지만 정갈하고 친환경적인 디자인과 소품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일회용품 사용을 최소화하고, 음식물을 낭비하는 불합리성과 겉치레의 거품을 걷어낸 소박하고도 담백한 생활의 지혜. 영화를 보러 지역마을 주민들도 아이들과 함께 놀러오는 훈훈한 분위기. 이러한 작은 것들까지도 마음에 들고 편안했다.

환경소송과 제도개선운동(법률개정운동) 등을 하는 녹색법률센터, 아주 작은 곳인데 지지해주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환경은 우리가 숨쉬고 먹고 일하고 쉬며 살아가는 터전으로 모두에게 소중한데, 무분별하게 벌어지는 개발에 맞서 자신의 일처럼 분개하고 떨치고 일어날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는 4대강 개발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야하고, 법적인 투쟁도 준비하고, 사람들의 환경 인식을 넓히기 위해 문화적으로도 교육적으로도 섬세한 운동을 벌여 나가야 한다. 분명 필요하고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러한 일을 지지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비록 나는 땡전 한푼 못 벌고 있지만, ‘나중에 내가 안정적인 자리를 잡으면 그때 후원하자’라고 미루어버리면 점점 그러한 핑계로 후원을 미루게 될 것만 같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후원 가입서를 썼다. 환경운동에 어렸을 때부터 관심이 많고 나도 뭔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그 실천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깨달음이 가슴 속에서 차올랐다. 운동은 거창한 뭔가가 아니고,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쉽게는 일상적으로 고기보다는 비빔밥을 먹고, 관련 도서를 읽고 배우고, 일회용컵을 쓰기보다 그냥 컵을 쓰고, 일상에서 대안적인 문화에 관심을 갖고 감수성을 키우는 것. 그리고 운동단체는 재정적으로 어려우니 몇 푼이라도 후원해서 운동하는 사람들을 밀어주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토록 많다. 왜 그동안 나는 실천을 거창하게 멀리서 찾았을까.

녹색법률센터에 가입했더니 <작은 것이 아름답다> 3월호를 받았다. 지하철에서 집에 오는 내내 읽었다. 깨달음을 주는 좋은 글들이 가득했다. 특히 ‘양길승’이라는 사람에 관한 글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의사’라는 직업을 택한 게 아니라 ‘남을 도울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어해서 의사가 되었다. 산업재해를 겪은 노동자들을 치료한 이야기, 사회적인 현상으로서의 질병이 개개인의 잘못 탓으로 돌려지는 현실에 대한 비판… 양길승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픈 사람의 얘기를 듣고 ‘손을 잡아주는 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는 고백에 이르러, 나의 감동은 절정에 달했다. 왜냐하면 이 날 오전에 KT의 반인권적 인력퇴출 프로그램의 피해자들을 만났는데, 그 중 한 분의 손을 내가 꼭 잡아드렸기 때문이다. KT 전 관리자가 양심선언 자술서를 읽는 동안, KT 114 직원인 50~60대 여성분들이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구 눈물을 흘리시는데, 삶의 가느다란 희망마저 위태로운 그분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그 순간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분의 손을 잡아드리는 위로의 몸짓밖에 없었다. “힘내세요. 제가 기도해드릴게요. 그리고 대학생 친구들에게 문제를 알려줄게요.” 이렇게 말하니, 그분은 따뜻하게 내 손을 감싸 쥐며 고맙다고 하셨다.

녹색법률센터를 방문한 날, 나는 여러 가지로 지쳐있는 상태였다. 나는 조용히 가만히 있고 싶은데 왜 나는 이토록 감정적으로 몰입하고 정신적으로 집중하고 스스로를 힘들게 할 수밖에 없는가. 그런데 녹색법률센터에서 상영한 <핵의 귀환>이라는 영화에서 한 가지 실마리를 찾았다. 내가 진정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겸손하게 지속적으로 사회의 여러 측면들을 배우고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영화를 보며 생각했다.

핵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백 만년 만에 일어날 일이” “천 년만 에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는 흔해빠진 어법이 나는 싫다. 책임지지 못할 수사를 남발하며 숫자 장난하는 것 같아서다. 나는 미처 백년도 살지를 못했는데, 백 만년 만에 일어날 사고가 80년대에도 한번, 지금 2010년대에도 한번 일어났다. 작은 방사능 누출사고들이 일일이 이슈화되지 않았다는 것까지 감안한다면, ‘백 만년 /천 년만 에’ 라는 수사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어떤 어마어마한 수를 제시하든 간에 그 희소하다고 주장되는 확률에서 위험이 실재가 되면 얼마나 재앙인가! 영화를 보며 놀랐던 건, 현재에도 체르노빌에서 30km 반경에는 사람이 거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대 멸망한 도시의 폐허는 폼페이 유적처럼 그럴 법한데, 지금 동시대에 현대의 도시가 그렇게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라는 사실이 지금 우리에게 얼마나 잘 알려져 있는가! 체르노빌 근처, 방사능에 오염된 흙에서 자라는 풀은 방사능 수치가 여전히 몹시 높고, 공기 중에도 방사능 수치가 매우 높다. 하지만 방사능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맛도 없고 냄새도 없고 다만 서서히 축적될 뿐이다. 더 나아가, 핵폐기물의 처리와 보관에 대해서는 얼마나 사회적으로 합의되어 있는가. 원자력을 통해 전기를 얻는 것은 잠깐이지만 그후 10만년 동안 위험을 ‘관리’해야 하는 막대한 비용까지를 고려한다면, 핵발전이 과연 경제적인가? 이 세상에 알권리가 제대로 충족된다면, 정확한 정보에 기초해서 사람들이 판단할 수 있다면, 원자력 발전을 찬성할 수 있을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많이 회자되었지만, 현실의 레벨로 돌아왔을 때 ‘정의’를 따져 묻는다면, 내가 관심을 두는 측면은 에너지 정의이다. 원자력이 그토록 안전하다는 안전신화,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신화를 직, 간접적 광고 세례로 세뇌시킨 후, 위험에 대한 정보 인식을 방해받은 사회적 약자에게 위험으로 인한 피해를 가장 직접적으로 가중시키는 것이 옳은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은, 내가 기차 선로에서 어디로 방향을 틀지에 따라 한 사람이 죽을 수도 있고 아니면 여러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극단적인 상황에서의 선택을 가정함으로써, 정의에 대한 고민을 내가 평소에 부딪힐 리가 없는 문제로 만들어버리지만, ‘정의’에 대한 고민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전기, 형광등의 불빛 하나 하나에도 스며들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원자력 발전을 반대하는 환경운동가의 담론을 ‘이상주의적’인 몽상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원자력은 위험하지만 인간이 충분히 그 위험을 통제할 수 있다고 보는 기술지상주의자의 낙관론이 오히려 더 비현실적, 비이성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 나아가, 이익의 계산이라는 측면에서도, 25년 동안 작동하면 본전(건설, 투자비용)을 회수할 수 있는 원전의 경우, 25년이 지난 다음에도 계속 원전을 작동시키면 이윤을 낳는 것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낡은 기계를 망가질 때까지 써도 되는 다른 물건과 달리 원전은 그 위험성(30분 만에 노심이 녹아내려 90분 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의 증가를 왜 비용 면에 포함시켜 계산하지 않는가 의문이다. 과학도 결국 이토록 정치적이지 않은가. 자기주장을 하기 위해 불리한 근거를 배제하는 소피스트들처럼, 과학기술자들도 ‘싫어서 또는 몰라서’ 특정한 것들을 계산에 포함시키거나 배제하지 않는가.

녹색법률센터에 방문한 덕분에, 환경에 대한 관심을 더욱 키워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당위성에서가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내가 좋아해왔고 소중히 여기는 분야를 더 알고 싶고 아름다운 환경을 향유하고 싶다는 마음의 끌림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