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칼럼] 잃어버린 법적 상상력과 공상을 찾아서: 법과 문학에 대한 단상

2021년 11월 4일 | 녹색칼럼, 활동

 

이계수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잃어버린 법적 상상력과 공상을 찾아서: 법과 문학에 대한 단상

 

Ⅰ. 법과 문학이란?

 

나는 별다른 취미활동을 하지 않는다. 남는 시간에 소설 한 줄 읽을 수 있으면 행복하다. 어느 순간 ‘법과 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면서 은퇴 후에도 외롭지 않겠구나, 하며 혼자 웃었다.

법과 문학은 ‘문학의 법’(=법적 규율 대상으로서의 문학, Law of Literature), ‘문학으로서의 법’(Law as Literature), ‘문학 속의 법’(Law in Literature)을 다룬다. 오스카 와일드는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책은 잘 썼든지, 잘못 썼든지 둘 중 하나다. 단지 그뿐이다.” 그러나 작가의 도덕적 세계관이나 예술표현을 (형)법으로 재단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것의 온당함을 따지는 일을 ‘문학의 법’이 담당한다. ‘문학의 법’에서는 문학의 도덕성과 비도덕성, 검열, 포르노그래피의 문제, 여러 형태의 출판물(서적+온라인) 범죄(모욕죄나 명예훼손죄, 선동죄, 혐오범죄)를 다루는 일 외에 저자의 권리, 지식재산권을 다루는 민법적 논의를 할 수 있다.

와일드는 저 글을 쓰고 얼마 안 가 ‘도덕 재판’을 받고,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와일드 재판은 그때나 지금이나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도덕적 엄숙주의를 성찰하는 계기를 제공한다(‘문학 속의 법’). 그때 오스카가 법정에서 ‘문학(의 문장)으로 법률(문장)의 허구와 위선’을 반박하는 장면은 ‘문학으로서의 법’이 서술한다. 요즘 유행하는 이른바 ‘시적 정의’의 영역이다.

뭐 어찌 되었건 내가 문학(주로 소설)을 읽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일이 법의 근본 문제들, 법 해석의 가능성과 한계를 새롭게 사유하고 점검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Ⅱ. 법에도 감정이 있는가?

 

나는 지인들에게 <레미제라블> 전 5권(번역서 기준)을 꼼꼼히 읽어보라고 권할 때가 있다. 이 책은 번역서 기준으로 3,000쪽에 달한다. 로스쿨 학생이라면,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돌덩이같이 무겁고 두껍고 단단한 법서를 읽기도 바쁜데, 이런 걸 왜 읽어야 하나? 뮤지컬 영화 한 편 보면 될 것을. 그건 맞는 얘기다. ‘여러분 고전을 읽어야 해요. 고전은 영어로 클래식이라고 하고, 이 말의 어원을 추적해보면 인간의 심리적 위기에 진정한 정신적 힘을 부여해주는 책이라는 뜻이 나와요, 운운.’ 이래봤자 소용없다. 다 자기가 필요하면 읽는 것이다. 게다가 <레미제라블> 같은 책은 법서처럼 두껍지만, 법서만큼 무겁지는 않다. 작가는 가볍게 뼈를 때릴 줄 안다. 그런데 거기에 법이 있다. 머리가 아니라 심장으로 느끼는 법. 인간의 얼굴을 한 법, 생명의 숨결을 느끼는 법. 법은 이성의 질서이기도 하지만 뭇 생명의 삶과 고통에 공감하는 정념의 질서이기도 하다. 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열려있고, 인간적이면서도, 환경과 생태의 변화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법률가가 될 수 있다. 가습기 살균제 재판에서 법의 이성만을 고집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는 이미 분명해졌다. 법률가는 법의 이성을 넘어서는 혹은 그것과 함께 하는 과학의 이성(precautionary principle)과 공상의 세계에도 마음을 열어야 한다. ‘기후 위기는 문화의 위기이자 상상력의 위기이다’(아미타브 고시).

‘법률 교사’의 입장에서 법과 문학의 가능성에 답한다면 이런 설명도 가능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전통적인 과목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의 결정적인 선택을 성찰하도록 이끌 수 있을까? 교사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 하나는 그 과목에 담겨 있는 ‘큰 이야기’를 학생의 삶에 있는 ‘작은 이야기’와 분명하게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은 원래가 작은 이야기(노벨레)가 아니었던가. 심지어 영웅서사시의 작가인 호메로스조차도 군데군데 민중들의 작은 이야기를 끼워 넣었다.

물론 소설을 읽는다고 당장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직접 체험하지 않고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도 얼마나 많은가. 그럴 때는 직접 몸으로 살아보는 수밖에 없지만, 누구나가 난민이 될 수는 없다. 그래도 나는 에리히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읽고 난민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지극한 마음으로 추체험해본 판사라면 ‘난민인정 거부처분 취소소송’에 대한 판단도 다르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법률가가 굳이 시간을 내서 소설을 읽을 필요가 없다. 법에도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판사들 보라고 <개선문>이 법원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이다.

형사재판에 피해자와 그 가족의 감정(感情)을 반영하는 문제는 조금 더 신중하게 다룰 문제이다. 다만, 미국 연방 대법원은 법정에서의 피해자 증언(victim impact statement)을 응보적 정의(retributive justice)의 관점에서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데(Payne vs. Tennessee, 1991), 이것이 대중의 복수심을 적절히 제한하면서도 피해자의 정신건강 회복에 기여하게 하려면 ‘법과 감정’ 혹은 법의 이성과는 ‘결이 다른 이성’에 대한 연구가 더 깊이 있게 진행되어야 한다.

 

 

Ⅲ. 공정과 사랑

 

소설 중에서도 <레미제라블> 같은 고전 문학을 굳이 읽어야 할 이유는 또 있다.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이런 말을 자주 한다. 40대만 되면 회사에서 쫓겨나는 세상이다. 성공적으로 졸업하고 취업한다고 하더라도 살면서 여러분은 반드시 한 번 이상의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그 위기를 견딜 힘을 고전에서 찾아야 한다. 책 읽는 습성을 몸에 간직한 이라면 절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잃었어도 그에게는 읽어야 할 고전이 ‘12권’은 남아 있다. 그 책들을 읽고 다시 일어서면 된다. 너무 개인적인 접근인가?

그렇다면 요즘 유행하는 ‘공정’ 얘기를 해보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우리가 말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종교적 이상을 수업이 되풀이하고 있지만, 우리들의 관계는 기껏해야 공정의 원리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공정은 상품과 용역의 교환에서, 그리고 감정의 교환에서 사기와 속임수를 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질적 재화에서나 사랑에서나 ‘받은 만큼 준다’는 것이 자본주의사회의 보편적인 윤리적 격언이다. 공정 윤리의 발달은 자본주의사회의 특별한 윤리적 공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자본주의적 사회에서 재화의 교환은 직접적인 힘이나 전통, 사랑 또는 우정이라는 개인적 유대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사회에서 모든 일을 결정하는 요인은 시장에서의 교환이다. 상품시장, 노동시장 또는 서비스시장 등 어느 시장에서 거래를 하든, 각자는 폭력을 사용하거나 사기를 치지 않고 시장의 조건에 따라 자기가 얻고 싶은 것과 자기가 팔 수 있는 것을 교환한다. 자본주의사회의 노동자는 노예와 달리 자신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팔 수 있다. 노동자에게는 ‘노동력’에 대한 처분권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노동’에 대한 처분권은 갖고 있지 않다. 무슨 말인가? 잘 모르겠으면, 직장에서 자기 마음대로 노동을 해보면 안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라고? 그래 맞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법률 폐하는 부자든 가난뱅이든, 다리 밑에서 잠자지 말 것, 거리에서 구걸하지 말 것, 빵을 훔치지 말 것을 평등하게 명령한다.”(아나톨 프랑스, <붉은 백합>) ‘붉은’ 백합이라니. 그래서 공정한가?

‘공정’의 의미는 자본주의사회와 ‘비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의미가 다르다. 전자에서는 윤리적 요소와 공동체의 관습이 고려되지 않는다. 프롬식으로 말하면 사랑 또는 우정은 공정을 판단하는 요소가 아니다. 그래서 사랑의 실천은 공정과 사랑의 차이를 인식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만 이 일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프롬은 묻는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몸 담고있는 온갖 사회 경제적 조직이 각자가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바탕을 두고 있다면, 즉 그 조직들이 공정이라는 윤리적 원칙에 의해서만 조절되는 이기주의적 원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현존하는 사회의 틀 안에서 활동하면서 동시에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 그리고 답한다. 사랑을 매우 개인주의적인 주변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으로 만들려면 사회구조의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나는 고전을 읽는 것이 이러한 운동을 밀고 나가는 데 큰 힘이 된다고 믿는다. 왜 그런가?

 

 

Ⅳ. 정치적 계몽주의 프로젝트로서의 고전 읽기

 

고대의 재생(르네상스) 개념을 교과서들은 통상 1500년경의 이탈리아와 연결한다. 그러나 사실 근대 유럽에서 고대의 정치적 사회적 재생은 18세기적 현상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유럽 정치사>를 쓴 아르투어 로젠베르크는 부르주아 사회가 성장하면서 고대의 정치적 사회적 형태(예컨대 공화정)가 현실에서 ‘재생’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18세기의 지도적 민중적 정치가 및 국가철학자는 당대의 혁명운동과 고대의 정치사회 형태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했다. 특히 학생시절 고대의 문헌을 배운 사람들에게 고대는 오늘날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시절 고전 읽기는 민중이 지배했던 역사, 민중이 주인이 되었던 역사로부터 용기와 도전 정신을 배우는 일이기도 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카틸리나 도당(徒黨)과 같은 이들과 투쟁해야 했을 때 자신을 제2의 키케로라고 생각했다.

단테는 <신곡>에서 시(=문학)란 정확히 세계 변화를 위한 것이라고 봤다. 단테는 이렇게 썼다. “나쁘게 사는 세상에 도움이 되도록(in pro del mondo che mal vive).”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잘못된 생각을 가진 피렌체 지도자들뿐 아니라 당시 유럽 무대에서 활동하던 주요 정치가들의 책임도 추궁해야 한다. 단테는 더는 영적 안내자 역할을 하지 못하는 교회의 타락을 비판하고, 노골적인 야심과 탐욕에 따라 움직이는 세속의 통치자를 비판했다. 단테가 비판한 자 중에는 판사들, 그리고 법 전문가들이 포함된다. <신곡>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변화를 일으키려는 텍스트다. 중세 세계관의 문학적 결정판으로 평가받는 <신곡>은 중세 시대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텍스트, 중세의 정치적 팜플렛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고’(古)‘전’(典)을 다시 읽자고 하는 운동은 근대 사회혁명을 배경으로 한 정치적 계몽주의의 프로젝트가 된다. 개인의 ‘일’로서의 독서가 정치적 사회적 주체화 ‘운동’으로 재정립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획’이 한국에서는 일본을 거쳐 ‘세계문학전집’ 혹은 ‘세계사상전집’ 읽기라는 독일-프로이센적 교양(Bildung) 쌓기 활동으로 재차 축소되고 말았다.

과거 한국의 청소년들 혹은 대학생들은 이런 전집에 수록된 고전 읽기를 강요당했다. 그 전집에 포함된 고전들의 맥락과 배경은 알지 못한 채. 당연히 책 읽기는 가장까지는 아니어도 하여간 재미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서양 최초의 문학이라고는 하나, 단 나흘의 전투를 1만 여행의 운문으로 기록한 <일리아스> 읽기는 가히 고문이 아니었을까. 17시간의 일정을 의식의 흐름 기법에 따라 1천 5백 쪽으로 서술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읽기는 또 어떤가. 나도 별수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나는 다른 방식의 고전 읽기를 시도해 보았다. 지금 이렇게 긁적일 수 있는 것도 그 덕이다. 나는 그때부터 문학을, 특히 내가 관심을 갖는 19세기 소설을 18세기 정치적 계몽주의 프로젝트의 연장선 속에서 읽고 있다. 다만, 이번에는 근대적 계몽의 맥락이 아니라 ‘파우스트’의 근대적 이성 자체를 성찰하고, 진보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맹신과 남성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들여다보는 반면교사의 사례로 당대 작품들을 읽는다. 또한 그림(Grimm) 동화를 읽으며 커먼즈(commons)의 ‘좋은 옛 법’과 생태적 질서가 생동하는 ‘동화의 숲’을 만나기도 한다.

 

 

Ⅴ. 잃어버린 독서 시간을 찾아서

 

고전 읽기의 중요성, 특히 법학자의 눈으로 읽는 소설 독법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분초를 다투며 노동해야 하는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한가로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사치다. 사회경제 양극화 통계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노동자가 노동에 대한 처분권을 갖지 못한 세상이기에 우리는 이런 사치를 누릴 수 있는 계급과 그렇지 못한 계급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치가 변혁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세상이다. 기본소득이 아니라 기본독서를 보장해야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동생 로베르 프루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불행한 일은 이거다. 큰 병에 걸리거나 다리라도 하나 부러지지 않는 한, 보통 사람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시간을 확보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거다.” 그러나 그는 세 번째 가능성을 빠뜨렸다. (과거) 프랑스 노동자들이 누렸던 긴 여름휴가(바캉스)다. 뜨거운 태양의 해변에서 혹은 골방이라도 좋으니 프루스트처럼 자신만의 공간에서 책을 읽는다면 그것만큼 달콤한 일도 없으리라. 괄호 안에 과거라는 단어를 넣은 이유는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이런 사치! 예전에 어느 정치인이 이런 선거 구호를 만들었다. “저녁이 있는 삶.” 그렇다. 저녁이 있는 삶. 충분히 휴식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삶. 자기 노동에 대한 처분권을 가진 삶. 여기에 일터와 ‘지역’에서 함께 책을 읽을 수 있는 문화를 쟁취해낸다면, 누구라도 수백, 수천 페이지의 책을 너끈히 독파해낼 수 있다. 노동자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주자! 정치는 이것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문화정책이자 노동정책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