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녹색서재] 이병일 소장과 함께 읽는

2020년 9월 29일 | 녹색칼럼, 활동


-이병일 변호사(법무법인 새길,  변호사녹색법률센터 소장)
 
남경태 <종횡무진 역사>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를 종횡무진 서술하고 있기에, 미국사, 일본사, 한국사 등 특정 국가 또는 서양사, 동양사라는 하나의 문화권을 중심에 두고 연대기적으로 사건 중심의 서술을 하는 역사책만 접했던 경험과는 완전히 다른 신세계를 누비는 색다른 경험이 되었고, 가끔은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전혀 예상하지 않은 관점으로 역사를바라보는 필자의 내공에 감탄과 부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주로 중국을 중심에 둔 동양사와 유럽을 중심에 둔 서양사를 비교하면서 틈틈이 한국사를 살펴보고, 일본과 미국의 역사를 양념처럼 뿌려놓아, 전혀 다른 여러 가지 재료를 가지고 며느리도 모를 비법 레시피로 그럴듯한 한 그릇의 음식을 뚝딱 만들어 기분 좋은 지적 포만감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기분이랄까요.
문명은 그 밝은 중심부로부터 주변부로 번지면서 문명의 밝은 빛의 혜택을 보게 되고, 세계사적으로 문명의 중심은 동양에서 서양으로 그리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 신대륙으로 움직여 왔으며, 이제 그 흐름을 이어 태평양을 건너 동아시아(아쉽게도 결국에는 중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되기는 함)으로 다시 그 문명의 중심이 옮겨올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표를 던지면서, 이와 같이 문명의 중심이 이동하고, 강성하였던 문명이 퇴락하고 새로운 문명이 힘을 얻게 되는 원인은 분권과 균형,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형성이라는 점으로 요약된다는 것이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감상평입니다.
재미있던 구절은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양에서는 나라가 언제 누구에 의해 건국되었는지 뚜렷이 나타나는 반면에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서양에서는 나라가 언제 건국이 되었는지, 누구에 의해 건국이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국을 살펴보면 단군 고조선, 고주몽 고구려, 왕건 고려, 이성계 조선인 것처럼 중국을 살펴보더라도 무왕 주나라, 시황제 진나라, 유방 한나라, 조광윤 송나라, 칭기즈칸 원나라, 주원장 명나라, 누르하치 청나라로 나라의 명칭과 건국자, 잘하면 개국년도까지 알 수 있는 반면에, 서양의 역사에서는 나라의 명칭이 어떻게 유래되었고, 개국한 인물이 누구인지도 불분명한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이어서, 로마는 도시의 명칭이면서 나라의 명칭이고 로마의 건국자가 누구인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쌍둥이 형제인지 신화속에서만 존재할 뿐이고, 현재 우리가 나라로 인식하고 있는 프랑스, 독일,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등등이 언제 누구에 의해 그와 같은 나라 명칭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는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동양의 경우 명분을 중시하여 읍면 단위에서 수백명 무리를 모아 놓고도 거창하게 나라 이름을 지어 걸고 개국이라는 공식 절차를 거치는 반면, 서양은 애초 이름도 없었던 무리가 그 세력이 커짐에 따라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고 그에 따라 부지불식간에 하나의 국가로 인식이 되기에 나라의 명칭에 대한 유래도, 그 건국자도 명확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으로 결국 실리를 중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지요.
중국의 역사는 중원을 중심으로 동심원적으로 커져 나가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중앙집권적인 모습을 보이기에 초기에는 강한 힘을 발휘하는 반면 개국 초기의 활력이 중기 이후에는 점차 잦아들다가 대략 300년을 넘지기 못하고 쇠락의 길로 접어들어 결국에는 이민족의 침입으로 망하는 모습을 반복하고 있으나, 유럽의 역사는 일정한 중심이 아닌 분열과 분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통해 그 중심이 이동하면서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는 차이가 있는데, 중원을 중심으로 발전하는 중국 역사에 있어서도 오히려 송원명청의 집중의 시대보다는 춘추전국시대, 남북조시대, 오대십국의 3차례의 분열기에 있어 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북이탈리아의 자치도시들과 알프스를 넘어 플랑드르지역 한자동맹의 자치도시들의 단일한 중앙권력이 없는 분립의 활발한 역동성이 르네상스시대를 이끄는 중심이 되었다는 점에서 힘의 집중이 아닌 분산과 대립, 경쟁을 통해서 다음 단계로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살펴볼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의견은 통일되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기존의 생각에 대해 다시 되돌아보고, 힘의 분산과 분열에 대해 가지고 있던 막연한 두려움을 덜어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근현대사로 넘어와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을 일으킨 독일과 일본의 파시즘과 사회주의 사회의 몰락에 대해 살펴보고 있는데, 저자는 그 원인에 관해 시민사회의 경험이 결여된 국가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난 체제가 파시즘이며, 사회주의는 시민사회의 생략으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라고 진단을 하고 있습니다.
즉 독일과 일본은 후발제국주의로써 시민사회라는 제동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선발제국주의와의 경쟁에서 이기려는 과정에서 결국 파시즘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는데, 흔히 파시즘과 독재를 같은 것으로 여기지만 독재는 정부가 다수 국민들의 반대를 무력으로 억누르는 체제인 데 반해, 파시즘은 다수 국민들이 정부를 지지하고 정부가 표방하는 이념에 자발적으로 일체화된 체제를 가르킨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독일 나치즘과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제국주의 하에서의 독일과 일본 국민들이 보였던 모습을 생각해보면 미처 생각하고 있지는 못했던 부분이 금새 이해가 되었습니다.
전후 현재까지 독일이 전쟁의 책임에 대해 보이고 있는 모습과 일본이 식민지 시대의 책임에 대해 보이고 있는 모습이 전양지차인 점은 결국 파시즘 이후 건전한 시민사회가 형성이 되었는지 그렇지 못한지에 차이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현재 일본이 신군국주의의 부활로 치닫고 있는 점 또한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제동을 걸 수 있는 시민사회가 형성되어 있지 못하고 언론 또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이와 맞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러시아 제국은 시민혁명을 통해 시민사회의 형성이라는 단계를 거친 서유럽과는 달리 시민사회의 형성이 생략된 채 인텔리겐치아(지식인)가 혁명의 주도세력이 되었기에 결국 사회주의 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소비에트연방의 정치는 300년 전으로 되돌아가 가장 보수적인 체제를 취하게 되었고, 7년만에 병사하여 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 레닌 이외 30년간 철권통치를 한 스탈린,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등 소련의 최고 지도자들은 사실상 사회주의적 황제였으며, 1949년 사회주의 공화국인 된 중국 또한 시민사회의 형성을 생략한 상태로 탄생하였기에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문명의 중심이 미국에서 태평양 건너 문명의 발생지로 다시 돌아오는 흐름이 이루어져 중국이 명실상부한 중화가 되기 위해서는 결국 중국 시민사회의 형성 여부에 관건이 있다고 할 것이고, 만약 중국의 시민사회에 형성되지 못한다면 중국의 경제력, 군사력이 미국을 앞서는 날이 오더라도 문명의중심으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을 해보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살펴보면 2014년 홍콩 우산혁명, 2019년부터 진행되는 송환법 반대 시위가 홍콩 시민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사적 의미가 될 수 있고 홍콩의 시민사회가 대륙으로 확산되어 중국 본토에서도 시민사회가 형성되어 견제와 제동을 걸어주는 그런 날을 기대해 보게 됩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책속에서 저자가 했던 무수한 말 중 저의 뇌리에 맴돌았던 것은 “건전한 시민사회의 형성”이었고, 잘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만두지 않고 뛰엄뛰엄 질기게 하고 있는 녹색법률센터 활동이 한국에 있어 건전한 시민사회의 형성에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름 자부심을 느껴 봅니다.
기타 책의 내용 중 전후 처리에 있어 동양과 서양의 차이에 대해 언급된 부분도 기억에 남습니다. 꼭 한번 찾아보세요~~~